항구를 감싸 안은 ‘나릿골’과 ‘벽너머 마을’
수십 일째 계속되는 이상 한파 전국을 덮쳤다. 산도, 들도, 강도, 우리들 몸과 마음도 어느 때 겨울보다 꽁꽁 얼어붙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봄꿈을 꾸고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바닷물마저 얼릴 정도로 추위가 기승을 부린 동해안의 작은 항구 마을에도 그래서 활기가 넘친다. 동해안에서 날아온 강원도 작은 항구 마을의 새해 이야기들.
추워도 너무 추웠다. 차에서 내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시군구 경계에서 뿌리는 구제역 방역용 소독약은 차에 달라붙는 즉시 얼어버렸고, 바위를 때리는 바닷물도 겹겹이 얼어붙었다. 수은주가 영하 20도 가까이를 가리킨, 수십 년 만에 가장 추웠다던 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여 줄 리도 만무했다. 그래도 삼척항은 활기찼다. 항구하면 어부와, 배와, 수산물과, 손님들이 북적이는 장면을 으레 떠올리고야 마는 에디터의 단조로운 상상력을 위안이라도 하듯이. ‘그 풍경에 감동해 자연히 나도 추위를 잊었더라’는 식의 미사여구는 글로만 가능한 것이라 치고, 진심으로 삼척항과 항구를 둘러싼 마을에 대해 전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극심한 추위 속에서도 삼척항의 사람들은 분주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저기 어디쯤, 유명한 관광지에서 예외 없이 마주치게 되는 인위적인 냄새 가득한 풍경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는 것.
항구의 종류는 많다. 큰 항구가 있는가 하면 작은 항구도 있고, 수출입 항구가 있는가 하면 어부들이 모여 사는 어항도 있다. 오래 전, 정라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강원도 삼척시의 삼척항은 두 가지 색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수산물을 잡아 삶을 이어가는 어부와 그들의 포획물을 사려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항구이기도 하고, 인근 동해항과 더불어 해외로 시멘트를 수출하는 주요 통로이기도 하다. 정라항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길이 91m의 방파제를 축조하면서 작은 어항이 만들어졌고, 이후 지속적인 축항 및 보수 사업을 거치면서 현재의 대규모 항만 시설을 갖췄다. 항구를 따라 자연히 발달한 것은 갖가지 수산물을 파는 시장. 다른 항구들과 마찬가지로 삼척항에도 꽤 큰 수산시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특히 3~4년 전 생긴 항구 바로 앞 횟집 거리에서는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신선한 수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 별도의 식당을 운영하지 않고 수산물만 판매함으로써 부가적으로 발생되는 비용을 줄인 횟집들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항구 주변의 방파제 등 어디에서나 바닷바람을 마시며 신선한 수산물을 즐길 수 있다. 삼척항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또 다른 특산물은 대게다. 흔히 대게라고 하면 영덕이나 울진을 떠올리지만, 그곳에서 거래되는 대게들이 모두 삼척에서 건너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 몇 년간 삼척시와 삼척우체국은 ‘삼척대게’를 브랜드화 하려는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덕분에 지금은 항구 주변의 큰 도로를 따라 많은 대게 음식점이 자리를 잡았다. 저렴한 가격에 신선한 국내산 대게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 대게는 특히 겨울철에 먹어야 제맛을 즐길 수 있다. “암컷 대게나 어린 대게를 잡지 않으려는 노력에 힘입어 요즘은 1년 내내 대게가 많이 잡혀요. 사시사철 아무 때나 와도 맛있는 대게를 먹을 수 있죠. 하지만 진짜 대게 맛을 보려면 겨울이 제격입니다. 특히 보름 즈음에 대게 살이 가장 맛있답니다.”
삼척항의 또 다른 볼거리는 항구를 병풍처럼 감싸 안은 마을이다. 항구의 발전은 사람들을 불러들였고, 그들은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마을을 만들었다. 이 항구 마을은 행정구역상 정라동이라 불리는데, 원래는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 있었다. 김하수 집배원은 “항구를 바라보며 오른쪽으로는 나루터 옆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나릿골’이, 왼쪽으로는 벽처럼 솟은 언덕이 나릿골과 경계를 만든 ‘벽너머’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큰 도로가 생기고 벽 역할을 했던 언덕도 대부분 개발되어 정라동이라는 하나의 지명을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릿골과 벽너머 마을이라는 정감 넘치는 이름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둘이면서도 하나인 정라동 마을은 화려한 색을 지닌 곳도, 이렇다고 자랑할 만한 큰 특색을 가진 곳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는 시골 마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삶의 정취는 넘쳐난다. 작은 골목길을 통해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삐뚤빼뚤 쓰인 이름을 가진 낡은 우체통이 있고, 햇살 잘 드는 앞마당에는 빨랫줄에 걸린 빨래가 흔들린다. 꼬불꼬불 좁고 높게 이어지는 언덕길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파란 하늘을 만나고, 어느 곳에서는 대나무 숲을 만난다. 마을 높은 곳 어디에서나 내려다보이는 삼척항의 탁 트인 모습은 마을길 순례의 하이라이트. 특히 서 있는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 풍경을 바꾸는 항구의 모습이 백미다. 겨울이면 언덕 듬성듬성 자리 잡은 집들이 약간은 황량한 풍경을 만들기도 하지만, 봄·여름·가을이면 마을 곳곳에 자리 잡은 풀과 나무들이 산과 집, 바다와 어우러져 자아내는 넉넉한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